티스토리 뷰

한국/-

원경 / 이혜미

Vagabund.Gni 2023. 6. 3. 21:28
728x90
반응형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 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잠시의 영원이라 믿으며. 섬 저편에 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에도 소라의 품속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구나. 먼 곳이 언제나 외로운 장소는 아니야. 아침의 눈꺼풀 속으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밤의 마중, 꿈의 배웅.

  바래다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해안의 경계선이 손을 내밀듯. 꿈을 밤 가까이 데려오기 위해 우리가 발명한 것들 중 가장 멋진 게 바로 시간이니까.

  최대한 위태롭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바다에 가자. 무게를 잊고 팽팽한 수평선 위를 걸어봐. 멀리를 매만지던 눈 속으로 오래 기다린 풍경들이 쏟아지도록.

반응형

'한국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 흐르는 눈 3 / 한강  (0) 2023.06.16
지극히 사소하고 텅 빈 / 김 근  (0) 2023.06.11
진은영 / 사실  (0) 2023.06.09
사랑합니다 / 진은영  (0) 2023.06.02
어울린다 / 진은영  (0) 2023.05.27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 진은영  (1) 2023.05.20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