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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양이

둘째에 대하여.

Vagabund.Gni 2017. 9. 11.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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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희는 크게 외로움을 타는 고양이는 아니었다.


단 둘이서 일 년 하고도 절반을 지내며 내린 내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데려온 이유는,


어느 밤의 경험 때문이었다.


특별한 밤은 아니었고, 다만 얕게 잠든 탓에 작은 소리에도 정신이 돌아오는


그런 종류의 시간이었다.


건희의 철제 밥그릇에 사료가 구르는 소리,


빠각 빠각, 사료를 씹어 넘기는 소리,


세상 조용한 반지하 방에서 건희가 밤에 혼자 남은 밥을 먹는 소리였다.


그게 어찌나 슬프게 들리던지...


내가 밥을 챙겨주고 출근을 하고나면 하루종일 혼자 놀다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 소리만 울리며 밥을 먹는다는 상상이 들어


참을수가 없었던 기억.


둘째 딩거의 엄마는 페르시안 친칠라, 아빠는 러시안블루라고 했다.




2017년 8월 24일 목요일, 딩거가 죽었다.


늘 힘이 넘치던 우리의 둘째이자 건희의 동생은


순한 성격과는 달리


급히 세상을 떠났다.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와


원망할 곳을 찾아 헤매는 나,


사진 속 딩거는 너무 말라있었다.


평소엔 한번도 누운적 없던 책상 아래서 옆으로 누워 떠난 딩거.


적어도 다시 아플 일은 없겠지만


뒤에 남겨져버린 내겐 그게 위로가 될 턱이 없다.




사일 밤낮을 울었다.


밥도 거의 먹지 못한 채로 침대에서 거의 떠나지 않고.


처음 오던날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찍은 사진들을


수도 없이 보고 또 보았다.


속은 낮밤처럼 뒤집히고, 살은 빠지고.


제정신인지 자는지 분간이 안되는 정신상태와


그나마 먹은 것들을 전혀 소화시키지 못하는 위장을 끌어안고


도망치듯 이집트에 도착해 집을 구했다.


바쁘게 살아도 편안히 쉬어도 결코 잊히지는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건 내 인생 가장 큰 상실의 경험은


구멍뚫린 차양처럼 메워질 줄도 모른다.




2015년 8월 17일 월요일


서울 한 지하철 역에서 우린 만났다.


어쩔수 없이 아이를 입양보내야 했던 너의 이전 주인은


내게 널 맡기기 직전까지도 너의 얼굴을 쓰다듬다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가버렸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토록 사랑을 받아서인지


너는 평생 결코 낯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동장 안에 앉은 네가 걱정이 돼


쓰다듬는 내 손을 껴안고 잠들었을 때,


경계하는 건희에게 먼저 다가가 기대 눕는 너를 보았을 때,


아니 그보다 먼저 나를 보는 너의 호기심 가득한 녹색 눈을 보았을 때


행복한 가족의 탄생, 그 예감이 여름밤을 스쳤었다.


그리고 오늘,


떠나는 너를 쓰다듬어 주지도


눈을 맞춰주지도 못하는 나는


요 며칠 왜 그리도 네가 보고싶던지......


이름을 부르면 당장이라도 울며 달려와


조금 높이 있는 내 손에 목덜미를 들이밀 것 같은데.


너의 부드러운 털과 발바닥


집중할 때 살짝 내밀던 혀


그리고 품안에 쏙 들어오던 너라는 존재.


아무리 그래도 너는 너무 빠르게 떠났다.




이렇게 빠른 이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것이 멈춰있었다.


심지어 블로그 이름과 아이디도..


딩거가 내게 온 후로 인터넷에서 쓰는 내 아이디도 전부 다.


그래도 일단은 계속 쓰고, 또 써내려가기로 했다.


당장 여행을 그만두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접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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