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

나에게 주는 시 / 류근

Vagabund.Gni 2022. 4. 26. 23:34
728x90
반응형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반응형

'한국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미(幾微) -리안에게 / 김경주  (2) 2022.04.30
공원의 전개 / 윤은성  (0) 2022.04.28
다른 이야기 / 김소연  (0) 2022.04.28
우산을 쓰다 / 심재휘  (0) 2022.04.25
뱀딸기의 효능 / 류근  (2) 2022.04.24
내 워크맨 속 갠지스 / 김경주  (2) 2022.04.23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