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

뱀딸기의 효능 / 류근

Vagabund.Gni 2022. 4. 24. 23:57
728x90
반응형

  먹을 수 없는 것이 식탁에 놓여 있어서 몹시 아름다운 세월을 살았다. 가령 마지막 월급 받은 날 황학동 27번지에서 산 청동 촛대라든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소포로 보내온 접시 두 개에는 성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가끔은 내가 사랑하거나 나를 사랑하다 그만둬버린 여자들, 그들이 꺾어온 꽃들, 노란 숟가락, 편지칼, 슬프게도 한 열흘씩 집을 비우고 난 뒤에는 푸르른 곰팡이들이 피어 햇살의 경계를 핥고 있었다. 여명이었고, 고양이를 키워야겠다고 결심한, 여자의 혼잣말은 지금도 들릴 것 같다.

 

  공포를 이야기하는 일은 너무나 단순한 일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당신은 나를 좀더 평화롭게 어루만지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나는 곧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서 사람들에게 더 슬퍼 보일 것이 두려워 그만 여기서 결별하자고 주문했다.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라고 당신은 드라마를 보며 말했다. 그건 사실 영국의 축구 경기였다. 노동과 알약 같은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린 너무 순수했거나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새벽 2시에만 문을 여는 이태원의 헝겊 가게를 나는 알고 있다.

 

  당신은 어떤 과거를 보관하기 위해 모든 것에 옷을 입히고 싶어 하는가. 나 또한 고요한 것은 진실 이전의 일이라 믿는다. 당신의 불편과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 오늘 내가 식탁 위에 준비해둔 음식을 보라. 멀고 푸르고 뜨겁고 단단하고 검고 빠른,

 

  아름다운 세월을 다시 살 수 있을 거라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사

반응형

'한국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미(幾微) -리안에게 / 김경주  (2) 2022.04.30
공원의 전개 / 윤은성  (0) 2022.04.28
다른 이야기 / 김소연  (0) 2022.04.28
나에게 주는 시 / 류근  (0) 2022.04.26
우산을 쓰다 / 심재휘  (0) 2022.04.25
내 워크맨 속 갠지스 / 김경주  (2) 2022.04.23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