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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곳으로 가려는 사람처럼

산길 초입부터 신발을 바투 묶었다

 

한 행(行)마다 나무 한 그루씩 들여놓고

행간에는 산국 향기가 채워진다

산벚과 단풍을 거느리는 갈참나무가 연(聯)을 이룬다

숲이라는 시집 시인이라는 숲

10월 끝물의 스산함을 단풍 불꽃으로 데워주고

만추의 양광(陽光)이나마 양껏 부어주는

산의 정령은 추운 사람을 안다

허수경 시인을 비다듬는 다정

 

부처보다 그리움이 힘세서

법당은 제쳐두고 고인 먼저 찾았다

갈잎이 구석에 몰려 부둥켜안고 있다

제가 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강인한 것들

생전의 미소 같은 산국(山菊)은

보러 오라 나부대지도 않는데 사람이 스스로 찾게 한다

시인이라는 꽃의 자존심이겠지

 

숲이라는 만 권 시집이 절집을 둘러서 있다

바람 되어 행간을 거닐겠지 제목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겠지

 

더는 나이 먹지 않게 된 고인의 사진 앞에 명복을 빌려다가

시집에서 만날 것처럼 인사했다

마지막 인사 사십구재를 치른 절집에서

허수경이라는 빈자리를 되짚어보았다

 

영면한 자리는 독일 Alst 35번지 수목장 장례식장

염습도 않는 타국이니 먼길 추워서 어쩌나 싶어

힘껏 만추의 양광과 단풍 불꽃을 짊어졌다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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