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

흑앵 / 김경미

Vagabund.Gni 2023. 7. 29. 02:28
728x90
반응형

크고 대단한 존재가 될 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도 오늘의 운동이라 친다
저 먼 사바나 누 떼를 만지고 온 알래스카 형상의
흰 구름 떼도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어지러운 머리카락을 조금 다듬었음은
오늘의 건축이라고 치고

 

오늘의 외출복은 오늘의 간접 화법

찻집 유리창 틀 먼지 한번 훅 분 것은

오늘의 자유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오늘의 숙소

 

돌아보면


저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고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둥그런 필름통 한 겹씩 감았을 가로수들
거기 낱낱히 찍혔을 순간들

이제야 값지게 되찾으려 흑백의 나뭇잎들

치마처럼 들춰보는 추억은

오늘의 범죄라 친다

많이 되찾고도 여전히 산뜻해지지 않는 날씨는

오늘의 감옥

 

노랑무늬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 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 난 눈을 검정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스물두세 살의 젖은 우산을 종일 다시 펴보는
이 때늦은 그리움을
오늘의 위대함이라 치련다

 

<밤의 입국 심사>, 문학과지성사

반응형

'한국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자의 시간 / 신용목  (0) 2023.08.19
당신은 운 것 같아 / 장수진  (0) 2023.08.12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김경주  (0) 2023.08.04
우주로 날아가는 방 1 / 김경주  (0) 2023.07.22
<제의祭儀> / 허연  (0) 2023.07.15
반쯤 인간인 동상 / 송승언  (0) 2023.07.09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