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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운 것 같아 / 장수진

Vagabund.Gni 2023. 8. 12.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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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면 안 돼 

교실 밖으로 나가 구름 도서관 위에서 몸을 던질 것 같아

 

당신은

상투적인 하루를 싫어하니까

그래, 죽는다면

잘 정리된 철학 서적 위에서 날아오른다면

조금은 다른 오후가 되겠지

누군가 당신을 보겠지

내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온 내가

무의미한 설거지에 지쳐

잘 가요, 또 오지 말아요

가난한 내가 가난한 자를 천대하는 마음으로

정말 죽고 싶어

술과 안주와 흘러간 가요 속에서, 돈 몇 푼 오가는 생을 깔보며

나는 말했지

노동이 끝나고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해

전태일은 정말 위대하지 않아?

새벽 두 시쯤

나는 칼끝을 한 번씩 만져보았지

아무렇지도 않았고

호프집 이모는 매일 내게 뜨거운 찌개를 끓여주었지

김 해서 밥 먹어라

당신은 조금 운 것 같아

시리아의 난민과

타국을 떠돌다 죽은 친구의 친구를 생각하며

혼자 남은 노모와 쓸쓸히 죽은 아버지

간밤에 자두 씨를 삼킨 작은 개 때문에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시시덕거려도

구청과 싸우거나

독서 모임에 나가 간신히, 몇 마디 한들

죽은 아이를 건네며 말이 없던

여인의 눈 속에서

헤어진 우리는 자꾸 마주칠 테니까

눈부신 아침에 고인 그날의 슬픔을

한 입씩

떠먹여주었으니까

 

-<사랑은 우르르 꿀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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