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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포도송이 / 황병승

Vagabund.Gni 2023. 8. 2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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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위대한 배우였지만 사랑에 번번이 실패하는 불행한 여자에 불과했다

    흑백의 필름 속에서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랜 세월 버려진 한 늙은 여자의 침실 풍경이 떠오르곤 했다 굳게 닫힌 유리창과 얼어붙은 커튼 자락, 얼룩진 거울과 침대 위에 켜켜이 쌓인 이상하리만치 소중해 보이는 먼지들 그리고 난데없이 떠오르는 헨리 8세식의,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벽난로……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인사들이 자신의 과거를 털고 닦고 정돈한 뒤에 ‘자 지금부터 보시는 것은’으로 시작하는 전시를 하고, 이런 식의 박물관 투어를 하며 우리의 패키지는 얼마나 지루하게 반복되고 또 늙어가는 것일까 타는 향을 즐기기 위해 장작 대용으로 썼다는 고대 영국의 검은 빵처럼, 쏟아지는 빗물과 먼지와 바람과 햇빛 속에서 구워진 여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가족과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했고, 온갖 소송과 추문 속에서 울고 웃고 춤추고 노래했던 여자

*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록 밴드의 보컬이자 뛰어난 기타리스트였지만,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가엾은 소년에 불과했다
    빽빽한 공연 일정에 맞춰 비행기와 보트, 전용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의 그는 언제나 취해 있었고, 십대부터 이십대 후반의 그루피들이 유령에 홀린 사람들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았었다 그리고 누군가 때에 전 차창에 미지근한 입김을 불어 써놓은 손글씨,

  
    너덜란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을 거쳐 그의 마지막 공연장이 될 종착역, 유럽 북서부의 입헌군주제 국가, 튤립과 풍차의 나라……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죽어가는 왕들과 신음하는 왕실의 미래 몰락 속에서, 몰락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온 집안이 취해 있었고, 서로가 그것을 묵인했다는 것, 번영의 시간보다 몰락의 시간이 너덜란드를 더욱 치명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 병들어 죽어가는 연인들이 서로의 차가운 몸을 부둥켜안고 열정적으로 주고받았을 질문과 대답처럼…… 마치 이 모든 게 구름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게 첨탑을 지나는 구름과 같다고 생각하면서

*

    기차를 타고 헤이트(hate) 시(市)에서 헤이트 시로 이사를 다닐 때였다
    그 시절 나는 침대에서 내려올 수도 없을 정도의 중병을 앓거나 심장마비를 일으켜 순식간에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뿐이었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밀가루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노라면, 어느새 차갑고 물렁거리는 밀가루 대가리가 되어 불타는 오븐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오빠, 저기 봐, 하늘에 ‘1’이라고 쓰여 있어, 차창을 가리키던 어린 동생의 모습…… 
    바보 같은 소리, 하늘에 1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니라 그건 차창에 붙어 있는 번호다, 퉁명스럽게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 그는 이어서 열심히 하면 된다, 라고 뜬금없는 말을 했는데 아마도 혼자만의 머릿속에서 ‘1등’을 떠올렸나보다 그때 나와 동생은 잠시 할 말을 잊었지만, 나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그의 말이 이상하리만치 소중하게 느껴졌다

    전에 살던 동네의 한 대중목욕탕에서 학교의 선생이라는 자가 찬물을 이리저리 튀기며 헤엄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도,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고 꺾어신은 신발을 바로 신을 때에도, 집 가족 식사 대화 내 방 내 방의 답답한 커튼 그런 것들이 싫어서 어두워진 공원을 늦도록 헤매다 똥을 주워 먹고 있는 떠돌이 개를 보았을 때에도, 두 번 세 번 양치질을 하며 피거품을 뚝 뚝 흘릴 때에도

   

    열심히 하면 생각이 다시 찾아온다
   

    열심히 하면 언제든 생각이 다시 찾아온다고, 나는 믿었었다 어리석게도 마치 이 모든 게 마당의 웃자란 잔디와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게 기계의 커터 속으로 사라질 쓸모없는 잔디와 같다고 생각하면서……

 

<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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