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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저녁 / 황인찬

Vagabund.Gni 2023. 9. 2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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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저녁 정약용이 친구 이서를 불러 어두운 실내에 다른 물건들을 물리고 촛불과 국화만을 두니 놀라운 문양이 벽면에 나타나 그 기이한 모습을 밤새 즐겼다고 한다

 

    그렇군요 그런 사랑도 있는 법이군요

 

    찻잎이 혼자 선다거나

    멀쩡한 그릇이 혼자 깨지기도 하지만

 

    해가 길어진 여름 저녁 거실 벽에 생긴 그림자를 보고도 이제는 놀라지 않습니다

 

    식탁 위에는 내가 먹지 않은 음식들

    깨지지 않은 그릇을 부시며 생각합니다

 

    깨지지 않은 그릇을 부수며 통곡합니다

 

    당신의 어둠이 당신의 존재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군요

 

    "기이하다. 이야말로 천하의 빼어난 경치로구나"

 

    정약용과 이서는 밤새 술을 마시고, 또 시를 읊었습니다만 이제 아무도 시를 읊지는 않겠지요

 

    혼자 흔들리는 그림자가 있고

    그걸 보며 밤새 우는 사람이 있고

 

    그걸 사랑이라 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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