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음악과 동거하다 보면 문득 당신이 입술에 와 앉는다 몸을 휘젓고 떠나간 음(音)과 귓속을 맴도는 음 사이 고산병을 앓는 밤 음악은 당신을 발명한다 어느 교인(敎人)들이 불태운 관(棺)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장례를 치르듯 어떤 심장박동을 빌리지 않고는 날려 보내지 못할 말이 있다 이루어진 소원은 더는 소원이 아닌 것처럼 곁에 없는 사람만을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듯이 한 이름을 흥얼거리다 보면 다 지나가는 이 새벽 당신의 이름을 길게 발음하면 세상의 모든 음악이 된다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가 닿지 않기를 바라고 우리는 음악을 울린다 -, 이현호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 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 민음사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 문학과지성사
첫 순간이죠. 이름을 기억하나요, 그대? 아무도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나는 나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내가 여름날 아침 나팔꽃처럼 시들 때 그대는 벼랑 끝에 걸린 아름다운, 더러운 노을이 되시겠다구요? 첫 순간이죠. 어쩌면 마지막인가요? 그대는 또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우리는 혁명을 기다리는 검은 그림자도 되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뻗어나가는 푸른 이파리는 더더욱 되지 못하고, 하늘과 땅 사이를 쏘다니지요. 단지, 고삐 풀린 천사처럼. 기억하나요, 그대? 나라는 이름, 그대라는 이름, 이름이라는 이름, 혹은 잘못 붙인 무수한 명명들. 혹은 그 무수한 밤의 멍멍들. 아무도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 장뤼크 고다르..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물 위를 고요가 흘러간다는 사실 물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 오늘 밤에도 그 애가 친지들의 심장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물을 무사히 건넌다는 사실 한양대학교 옆 작은 돌다리에서 빠져 죽은 내 짝은 참 잘해줬다, 사실은 전날 내게 하늘색 색연필을 빌려줬다 늘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많다, 사실일까 사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죽은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못한 것도 많을 텐데 노래가 여기저기 떠도는 이유 같은 거 그 사람이 꼭 죽어야 했던 이유 같은 거 그 이유가 여기저기 떠도는 노래 같은 거 사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짝은 입을 꼭 다물고 건져졌다는데 말할 수 없다 그 애가 들려주려던 사실 어둠의 긴 팔에 각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 문..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 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잠시의 영원이라 믿으며. 섬 저편에 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에도 소라의 품속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구나. 먼 곳이 언제나 외로운 장소는..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과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 솟아나는 저녁이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나에게는 빈 새장이 어울린다 피에 젖은 오후의 ..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에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당신이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차림으로 창문 너머의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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