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면 안 돼 교실 밖으로 나가 구름 도서관 위에서 몸을 던질 것 같아 당신은 상투적인 하루를 싫어하니까 그래, 죽는다면 잘 정리된 철학 서적 위에서 날아오른다면 조금은 다른 오후가 되겠지 누군가 당신을 보겠지 내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온 내가 무의미한 설거지에 지쳐 잘 가요, 또 오지 말아요 가난한 내가 가난한 자를 천대하는 마음으로 정말 죽고 싶어 술과 안주와 흘러간 가요 속에서, 돈 몇 푼 오가는 생을 깔보며 나는 말했지 노동이 끝나고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해 전태일은 정말 위대하지 않아? 새벽 두 시쯤 나는 칼끝을 한 번씩 만져보았지 아무렇지도 않았고 호프집 이모는 매일 내게 뜨거운 찌개를 끓여주었지 김 해서 밥 먹어라 당신은 조금 운 것 같아 시리아의 난민과 타국을 떠돌다 죽은..
시인의 말 여기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밤이라고 쓰고 거기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두운 골방이라고 믿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비정하고도 성스러운 이 세계 앞에서 경악했고 그 야설(夜雪)을 받아내느라 몸은 다 추웠다. 어두운 화장실에 앉아 항문으로 흘러나온 피를 닦으며 나는 자주 울었다. 나는 그것을 간직했다. 고백하건대 시는 내게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 현기증은 내 몸으로 찾아온 낯선 몸의 시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서러워서 길바닥에 자주 넘어졌다. 그사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무수한 책들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나는 여러 번 아버지가 되지 못했으며 눈이 외롭던, 기르던 강아지는 병으로 두 눈을 잃었다. 한 놈은 직접 내 손으로 버리기도 했다. 아들이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
크고 대단한 존재가 될 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도 오늘의 운동이라 친다 저 먼 사바나 누 떼를 만지고 온 알래스카 형상의 흰 구름 떼도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어지러운 머리카락을 조금 다듬었음은 오늘의 건축이라고 치고 오늘의 외출복은 오늘의 간접 화법 찻집 유리창 틀 먼지 한번 훅 분 것은 오늘의 자유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오늘의 숙소 돌아보면 저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고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둥그런 필름통 한 겹씩 감았을 가로수들 거기 낱낱히 찍혔을 순간들 이제야 값지게 되찾으려 흑백의 나뭇잎들 치마처럼 들춰보는 추억은 오늘의 범죄라 친다 많이 되찾고도 여전히 산뜻해지지 않는 날씨는 오늘의 감옥 노랑무늬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 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 난 눈을..
방을 밀며 나는 우주로 간다 산동네 지하 방들은 하나 둘 풍선처럼 떠올라 풍선처럼 날아가기 시작하고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인간의 수많은 움막을 싣고 지구는 우주 속에 둥둥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자신의 분홍을 밀랍하는 일이다 불씨가 제 정신을 뛰돌며 떨고 있듯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 가슴에 몇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 해주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뒤에서만 안고 ..
강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떠나보낼 게 많은 사람이다. 폭우 지나간 철제 다리 위로 이국처럼 노을이 진다. 쓰레기봉투 몇 개 떠다니는 몸집 불린 강을 내려다본다. 오늘도 강에선, 누구는 몸을 던졌고 누구는 떠올랐고, 누구는 몇 달도 못 갈 사랑을 읊조렸다. 제물은 늘 필요하다. 몇은 이번 장마의 제물이 됐고, 한 겹의 뻘이 되어 하구 모래톱에 쌓였다. 영역 다툼에 지친 물새들 줄지어 지나간 모래톱. 병든 고양이가 다 포기한 듯 졸고 있다. 고양이는 이번 장마의 마지막 제물이 될 것이다. 그에게 지금 이 짧은 햇살은 냉정하게 따사로울 것이다. 이곳에선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 슬픔도 기쁨도 없다. 쓸려갈 것과 남은 것, 그것만이 가능하다. 검은 구름 저편에 속삭이듯 어둠이 온다. 오늘의 제의는 이..
반쯤 파괴된 동상 모두 사랑했던 동상 사랑하던 사람들 다 가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다 가고 그 후손들 다 가는 이후에도 반쯤 파괴된 채 남은 동상 아주 파괴되지는 못한 동상 동상에게 동상의 외로움 있겠지 동상에게 동상의 슬픔 있겠지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동상 그러나 핏자국 눈물 자국은 있는 동상 이전을 아는 사람들이 만든 이전은 모르는 동상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이전을 가르쳐주는 동상 이제 가르칠 사람이 없는 동상 친절한 동상 슬픈 동상 없는 시간을 사는 동상 아닌 시간을 사는 동상 있어볼 만큼 있어본 동상 슬슬 없어도 되겠지만 없어질 수 없는 동상 사라진 누군가를 모델로 한 누군가의 모델인 동상 누군가가 잊힌 뒤에도 잊힌 누군가의 모델인 동상 그런 동상이 나 본다 반쯤만 인간인 -,..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
이 시집은 1959년 11월 30일에 발간된 전봉건의 첫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 제목을 빌렸다. 꼬박 6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셈이지만, 특별히 의식하고 정한 것은 아니다. 전봉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데 어째서 그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유 같은 것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것이다. 또 이 시집은 2017년에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과 아침달 출판사가 함께 발간한 한정판 낭독시집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로부터 출발했다. 애초의 구상은 그 시집을 그대로 옮겨 한 부로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그러지는 못했고 조금의 변경이 생겼다. 이 시집의 1부 은 2019년 5월부터 11월까지 메일링 서비스로 발행된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에 ..
원문고개 지나면 거기부터 통영이에요 외지 사람들은 원문고개 지나면 보이는 좁은 만이 하천처럼 보이나봐요 다들 그걸 두고 강이야 바다야 이야길 해요 외지 사람도 통영 사람도 버스가 그곳을 지날 때는 모두 오른쪽에 펼쳐진 바다를 봐요 거기부터 통영이에요 그것은 너무 고단해 오는 내내 잠들어 있던 내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는 아직 통영에 온 것이 아닌데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통영 사람들과 밤 부둣가를 걸었을 때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것이 너무 포근하다고 느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통영의 모든 것이 아름답군요! 나는 말했고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왼쪽으로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 창비
- Total
- Today
- Yesterday
- 스프링
- 중남미
- 알고리즘
- RX100M5
- 유럽
- 리스트
- 맛집
- 자바
- 세계일주
- Algorithm
- 동적계획법
- spring
- 칼이사
- 세계여행
- Python
- java
- 세모
- 여행
- 남미
- Backjoon
- BOJ
- 백준
- 파이썬
- 야경
- 기술면접
- 스트림
- 면접 준비
- a6000
- 지지
- 유럽여행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