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마약이다. 계속 살면 피폐해진다. 사랑은 이별한다고 잊거나 잊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덮어두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 중독되어 독신의 처방을 얻었다. 누군가 우는 것을 보면 울게 된다. 세상에는 더 이상 반전(反轉)이 없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동안 모든 걸 그리워하게 되었다. 서로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반려의 몸이여. 뒤돌아서면 등지고 온 무덤들이 많았다. 진짜 생각이란 없다. 생각을 떠나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잔류하는 이형(異形)의 삶이어도 삶이기에 죽지는 않는다. 이 색을 간직하겠다. 서로를 닮은 황홀경들이 착종하는, 인간의 미로. 그 주저흔의 골목길에서 우리는 재회하여 서로의 피를 확인할 수 있을..
악기만 남고 주법은 소실되어버린 공후를 본다. 휴休만 남고 용用은 사멸되어버린 악기, 썩어 없어질 몸은 남고 썩지 않는다는 마음은 썩어버린 악기. 악기는 고정된 세계의 현현이다. 주법은 이 현현을 허물어뜨리려 한다. 그러나 주법은 진동의 미세한 입자를 시간 속에 끼워 넣으며 악기의 경계와 세계의 경계를 건드릴 뿐인데 이 건드림, 이 건드림이 직조해내는 무늬, 진동의 미세한 입자들이 뿜어내는 숨과 그 숨의 웅숭그림이 천변만화해내는 세계, 나는 마음이 썩기를 원한다. 오로지 몸만 남아 채취되지 않기를, 기록되지 않기를, 문서의 바깥이기를. 이것이 마음의 역사다. 그 역사의 운명 속에 내 마음의 운명을 끼워 넣으려 하는 나는 언제나 몸이 아플 것이다. -, 문학과지성사
새들의 눈과 내 눈이 만나는 자리를 내 종이로 옮겨 온 저녁이라 부르면 나는 ‘이누이트 극지 모임’의 동인 같기도 하고 내가 가장 아픈 저녁에 내밀던 혀의 색깔 같기도 하다 바람이 가장 늦게 하늘로 옮긴 그늘에 가장 좋은 붓을 말린다 철새 중에서 사람의 눈을 닮은 놈이 가장 먼저 손발을 씻고 잠든다 종이 위로 흘러가던 그림이 갑자기 숨을 멈춘다 곧 자신의 그림자와 합류한다 그림자여 어서 오시라 여생을 마치기로 한 새들이 입을 벌려 목젖에 걸린 인간의 새하얀 뼈 한 조각을 보여 준다 자주, 마른 다리에 눈물이 나는 밤을 새들의 꿈에 등장하는 내 눈이라 부르지만 그게 모두 우리들 자신의 눈이라는 걸 알아보면 나무는 소름이 돋으며 모든 ‘곁’에서 순해진다 지난밤 꿈은 내가 한 번도 눈으로 보지 못한 하늘이라 ..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 문학동네
아침부터 저녁밥을 생각해도 정작 엉뚱한 음식을 먹게 되는 날이었다. 엉뚱한 카레를 앞에 두고, 엉뚱하고 다 식어가는 카레를 앞에 두고. 열 명이 갔다가 한 명만 돌아오는 날이었다. 오지 않는 아홉을 기다리는 저녁이었다. 그녀는 그녀보다 더 그녀 같은 사람과 대화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설득해준다면, 그녀는 더 긴 시간을 들여 그를 설득할 것이다. 손등에 떨어지는 마지막 햇빛을 쳐다보면서, 가끔 물을 마시고,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젓고, 뜨거운 침을 삼키면서. 우리가, 이렇게,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어떻게 -, 문학동네
당신을 생각하면 바다가 생각나요 젤리 물결이 되어 부드럽고 끈끈하게 저를 묶어 갔죠 절대로 헤어지는 일이 없게 당신의 모든 게 갖고 싶었어요 눈도 입술도 입속의 혀도 몸을 칭칭 감은 노끈 같은 다리와 먼 수평선이 지워질 포옹을요 당신이 옷을 벗을 때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커튼 새로 스미는 햇살 비단에 감싸인 누드 알몸이 보일 때까지 바라보는 게 좋았죠 옷 벗을 때의 공기, 그 흐름을 느끼고 슬프고 힘든 일은 잊었더랬어요 서로가 떠나간 후 멀어져 가는 버스나 기차를 봐도 아프지 않으려고 많이 아팠어요 이제 당신 없이 잘 사는 법을 터득하며 남녀의 국경선을 뛰어넘어 고단한 이들에게 노을 같은 꽃을 건네며 잘 지낼게요 다시 힘내자고, 다시 사랑하자고 붉고 뜨거운 소나기 박수 -, 민음사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악수하는 두 마리의 코끼리를 본다거나 검은 승용차가 집 앞에 도착한다거나 손을 귀처럼 떨군다 물방울마다 창문이 비친다 투명은 어디에든 차 있는가 창문은 아귀가 맞지 않는 종種인가 이런 창밖을 기억한다 볕이 지글거리는, 남자가 걷어찬 푸른 의자 같고 주인인 노인의 다리 같고, 그녀가 내다 놓은 마른 선인장 같은, 골목을 돌아 나가는 고양이의 얼룩 같은 그런 뺨을 기억한다 그가 지났던 곳에 생긴 그을음을 깨진 접시 위에서 파닥거리는 날생선을 그녀가 문지른 뺨에서 떨어지는 소금을 의자가 다시 접착되는 순서에 상관없이 해약하는 계약들의 종류에 상관없이 하루 중 한 순간은 기대어 손을 편다 벽과 손 사이에 화흔火痕인 두 개의 눈이 있다 갈라지는 손바닥, 두 마리의 코끼리와 그 사이..
- Total
- Today
- Yesterday
- 기술면접
- 리스트
- 여행
- Algorithm
- spring
- 지지
- 맛집
- 알고리즘
- Backjoon
- a6000
- 칼이사
- RX100M5
- 세모
- BOJ
- 유럽
- java
- Python
- 파이썬
- 스트림
- 면접 준비
- 세계여행
- 세계일주
- 자바
- 스프링
- 야경
- 유럽여행
- 중남미
- 남미
- 동적계획법
- 백준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