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가 젖어 있다. 어저께 비가 온 것은 아니다. 오늘 소나기가 지나간 적도 없다. 예보에서 이번 해는 장마 없이 폭염이 시작될 거라고 한다.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일생 동안 내내 얼어붙은 계절을 지나 첫번째 겨울잠에서 깬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다. 당신의 화법은 침묵과 나의 추측으로 구성되었다. 담벼락에 낙서된 두 개의 이름이 갈라지고 있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아일랜드 출신의 밴드 음악이 잡음으로 일그러지고 있다. 상관없이 젖은 거리가 이유 없이 마르지 않는다. 그해 한쪽에서 연인이 되는 것으로 짝사랑이 끝났고 반대편에서 짝사랑인 채 연인이 끝났다. 처음 신은 신발이 축축해진다. 어젯밤 쌓였던 음식물쓰레기가 반으로 줄어 있다. 집집마다 불이 꺼지고 누군가가 미워지는 시간 고양..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 문학동네
창 밖에 전염병과 전쟁과 귀신이 창궐해 있어서 창을 닫아도 소용없고 피난 갈 곳도 없어서 그녀는 아이들을 집에서 놀리고 밥 먹이고, 불러 앉혔다 어디에도 살 길이 없단다 이제 잠깐 살기로 하자, 살기로 하자, 기도하는 꿈에서 깨어났다 창밖에 전염병과 전쟁과 귀신이 창궐해 있었는데 문을 활짝 열고 서둘러 아이들을 씻겨 학교에 보낸 뒤, 그녀는 마트에 갔다 어디에도 죽을 길이 안 보여서 커피를 마셔볼까? 중얼거렸다 낮술을 한잔할까? 오후엔 잤다 어디에도 죽을 길이 없어서 우두둑 부활하듯 기지개를 켰지만, 이상한 날이다 해가 진 지 오래인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뉴스에, 뉴스가 나오지 않는다 -, 문학과지성사
황혼에 대한 안목(眼目)은 내 눈의 무늬로 이야기하겠다 당신이 가진 사이와 당신을 가진 사이의 무늬라고 이야기하겠다 죽은 나무 속에 사는 방(房)과 죽은 새 속에 사는 골목 사이에 바람의 인연이 있다 내가 당신을 만나 놓친 고요라고 하겠다 거리를 저녁의 냄새로 물들이는 바람과 사람을 시간의 기면으로 물들이는 서러움 여기서 바람은 고아(孤兒)라는 말을 쓰겠다 내가 버린 자전거들과 내가 잃어버린 자전거들 사이에 우리를 태운 내부가 잘 다스려지고 있다 귀가 없는 새들이 눈처럼 떨어지고 바닷속에 내리는 흰 눈들이 물빛을 버린다 그런 날 눈을 꾹 참고 사랑을 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고 하겠다 구름이 붉은 위(胃)를 산문(山門)에 걸쳐놓는다 어떤 쓸쓸한 자전 위에 누워 지구와의 인연을 생각한다고 하겠다 눈의 음정으로..
영원이라는 말을 쓴다 겨울의 도끼라는 말처럼 우연히 여기라고 쓴다 공원이라고 쓴다 누군가를 지나친 기분이 들었으므로 * 모자를 벗어두고 기타를 치고 있는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아이의 다리 위로 그대는 날아가려 하는가 발을 버둥거릴 때 옷깃을 쥐려 하는 손들이 생기고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돌아다니는 도끼 물이 어는 속도로 얼음이 갈라지는 속도로 겨울의 공원이 생기지,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나이여 그대의 곁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어린 수리공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언제든 완료할 수 있지, 그저 꽃잎을 떨구면 그저 붉은색 페인트 통을 엎지르면 상점은 짜부라지면서 물건을 토해내지, 상점의 주인처럼 주인의 집주인처럼 이빨들이 썩어가지, 그림자에서는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고 그대의 책장이 넘어가..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너는 매일매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어떤 용기를 내어 서로 손을 잡았는지 손을 꼭 잡고 혹한의 공원에 앉아 밤을 지샜는지. 나는 다소곳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를 되뇌고 되뇌며 그때의 표정이 되어서. 나는 언제고 듣고 또 들었다. 곰을 무서워하면서도 곰인형을 안고 좋아했듯이. 그 얘기가 좋았다. 그 얘기를 하는 그 표정이 좋았다. 그 얘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게 좋았다. 그날의 이야기에 그날이 감금되는 게 좋았다. 그날을 여기에 데려다 놓느라 오늘이 한없이 보류되고 내일이 한없이 도래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그리하여 우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좋았다. 처음 만났던 날이 처음 만났던 날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떠나가는 게 좋았..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 문학과지성사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을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 최측의농간
먹을 수 없는 것이 식탁에 놓여 있어서 몹시 아름다운 세월을 살았다. 가령 마지막 월급 받은 날 황학동 27번지에서 산 청동 촛대라든지 푸에르토리코에서 소포로 보내온 접시 두 개에는 성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가끔은 내가 사랑하거나 나를 사랑하다 그만둬버린 여자들, 그들이 꺾어온 꽃들, 노란 숟가락, 편지칼, 슬프게도 한 열흘씩 집을 비우고 난 뒤에는 푸르른 곰팡이들이 피어 햇살의 경계를 핥고 있었다. 여명이었고, 고양이를 키워야겠다고 결심한, 여자의 혼잣말은 지금도 들릴 것 같다. 공포를 이야기하는 일은 너무나 단순한 일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당신은 나를 좀더 평화롭게 어루만지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나는 곧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날이 어두워서 사람들에게 더 슬퍼 보일 것이 두려워 그만 여기서 결..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 밤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 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
- Total
- Today
- Yesterday
- 스트림
- spring
- 지지
- Algorithm
- 면접 준비
- 세모
- 칼이사
- 여행
- 남미
- BOJ
- a6000
- Backjoon
- 야경
- 알고리즘
- 유럽여행
- RX100M5
- 기술면접
- 세계일주
- 동적계획법
- 파이썬
- java
- 세계여행
- 리스트
- 백준
- 중남미
- 스프링
- 맛집
- 유럽
- 자바
- Python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