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조용히 오는 비 령(零)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령, 령, 나의 零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비에 씻긴 사물들 본색 환하고 넌 먹구름 없이 나를 적셔 한 꺼풀 녹아내리는 영혼의 더께 마음속 측우기의 눈금은 불구의 꿈을 가리키고 零, 무엇도 약정하지 않는 구름으로 형식이면서 내용인 령, 나의 령, 내 영하(零下) 때마침 너는 내 맘속에 오고 있었기에 그리움은 그리움이 고독은 고독이 사랑은 사랑이 못내 목말라 한생이 부족하다 환상은 환상에, 진실은 진실에 조갈증이 들었다 령, 조용히 오는 비 밤새 글을 쓴다 삶과의 연애는 영영 미끈거려도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긴 기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은 안 긴 기린 그림이다. 그린 기린 그림은 기린을 닮았나 기린 그림 그린 자를 닮았나.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기린인가 나인가. 그림과 기린과 나. 시와 세계와 나.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할수록 자꾸 헷갈리고 놓치고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매번 시한테 지는 거다. 그나마 내가 시의 말을 잘 들을 땐 기분좋게 지고, 시가 내 말을 안 들을 땐 분하게 진다. 기분좋게 진 기억보단 거절당한 감각이 더 우월하게 남아 있어 빈 종이 앞에선 늘 용기가 필요하다. 근데 용기를 내면, 시는 나에게 펭귄 머리에 쌓인 눈 고깔, 혹은 발밑에 숨겨둔 따뜻한 돌 같은 것을 선사한다. 나는 그것이 좋다. -, 문학동네
핏줄들도 버리려고 할 때 비극의 끝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센티멘털 누구에 의해서든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아닌 건 아니고 누추하지만 살면서 어떤 바닥이 제대로 절정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 몇 번이나 응원이 더 필요한 계절을 지나올 때도 오늘의 바닥에 닿지는 못했다 여분을 믿는 것처럼 주머니를 뒤집었다 이르고 도달해 나를 다 즈려밟고 지나가야 할 길 누구에 의해서든 압축되어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사람을 위한 과일이라기보다는 새들을 위한 열매인 듯 하늘 바로 밑에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노란 모과를 보았을 때 주인인 줄 알고 살았던 나의 생生에 객客으로 초대받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하면서 불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또,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로부터 체온을 나눠 받는 혹한이다 다 쓰고 씌어지고 버려질 나는 아름답고..
당신이 여기 있는 줄 몰랐다 세 번이나 뒤돌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나사 같은 허공을 급히 뛰다 추락할 뻔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은 목숨을 끊었다 내가 진작 잘했어야 했다 뚝뚝 흘리는 눈물을 보다 못한 경비원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 몰래 당신의 피에 손을 넣어본다 내 입에 흘려 넣어주던 당신의 피가 아직 따뜻하다 목숨한테 잘하는 법을 몰랐다 시늉뿐임을 알자 당신은 끝내 떠났다 지금이라도 액자 속으로 넘어가 뒤꿈치라도 잡아야 한다 참다 못한 경비원이 나를 떼어 거리로 집어던졌다 다음 날 또 간다 당신이 멀리 옮겨갔다고 늦게라도 잘하려는데 거짓말로 당신을 빼돌리려한다 하지만 속은 건 경비원이다 나는 당신 뒤에 숨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반지를 사서 돌아올 생각이다 그러나 당신의 무덤을 나서자 당신은..
아득한 곳으로 가려는 사람처럼 산길 초입부터 신발을 바투 묶었다 한 행(行)마다 나무 한 그루씩 들여놓고 행간에는 산국 향기가 채워진다 산벚과 단풍을 거느리는 갈참나무가 연(聯)을 이룬다 숲이라는 시집 시인이라는 숲 10월 끝물의 스산함을 단풍 불꽃으로 데워주고 만추의 양광(陽光)이나마 양껏 부어주는 산의 정령은 추운 사람을 안다 허수경 시인을 비다듬는 다정 부처보다 그리움이 힘세서 법당은 제쳐두고 고인 먼저 찾았다 갈잎이 구석에 몰려 부둥켜안고 있다 제가 약하다는 것을 알기에 강인한 것들 생전의 미소 같은 산국(山菊)은 보러 오라 나부대지도 않는데 사람이 스스로 찾게 한다 시인이라는 꽃의 자존심이겠지 숲이라는 만 권 시집이 절집을 둘러서 있다 바람 되어 행간을 거닐겠지 제목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겠지 더..
너무나 아름다운 빛을 내는 저 별에는 독가스가 가득하고 황산 비가 내리지. 그 말을 듣고 영화의 주인공은 말한다. 바로 저거야! 저걸 들여다봐야겠어! 때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복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 새장에서 태어나는 새도 날개가 있다. 새장 문은 열리지 않는다. 친구는 자신의 바다에 썰물이 없다고 썼다. 빠져나가고 싶어 하던 그 친구는 노르웨이로 갔다고 한다. 그때, 나는 그 책을 왜 껴안고 있었을까. 그런 방식으로 시간이 쪼개졌다. 아름다운 괴물도 그렇게 지나갔다. -, 문학과지성사
시인의 말 길에 떨어져 터진 버찌들을 보면 올려다보지 않아도 내가 지금 벚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등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보리 추수는 이미 지났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오래다. 보리서리를 눈감아주시던 외할머니의 거룩한 삶이 대관령 아래에 있었다. 검은 흙 속에서 갑자가 익으면 여름이라는 것을 알 듯 내 몸이 강릉에 가고 싶을 때가 많다. 강릉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다. 2018년 8월 심재휘 -, 문학동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
뭔가 하면 할수록 비천해갔다 밤의 이야기들은 어디에서 역류하였을까 누추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남으려는 몸 물이 물 아닌 시름 내 슬픔의 경로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인데 살아 자주 역류했다 당신이 관념이 아름다움이 세상모르고 거기 있을 때 서러운 풍경은 모이거나 흩어졌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문과 문 사이에서 앞날을 흔들어 보기도 했으나 거꾸로 서서 내일을 본 적 있니 웃어본 적 있니 물구나무서서 보는 일은 좀 괜찮았다는데 무언가 잘 안 되어 생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면 모쪼록 이것도 역설의 방식이라 하면 안 될까 나도 내가 아닌 곳으로 흐른 때가 많았으니 너무 오래되었다면 그리 두어라 긴 밤이여 솟구쳐 흘러라 -, 문학동네
겨울이 복용한 가루약이 서서히 헐거워지는 새벽입니다. 크게 앓고 일어나 몸의 뒷면을 바라보면 빛으로 다 스며들지 못했던 무늬들이 떠오르는군요. 실수로 삼켜버렸던 눈보라를 생각합니다. 스스로 가지를 꺾는 번개들. 자신 안의 망령을 찾아 떠나는 여행 속의 여행. 흐르는 것이 흐르는 것을 더럽힐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금 간 접시 위로 돋아나던 작은 손가락들을 보았지요. 구름 위를 유영하던 흰돌고래, 뒤늦은 감정처럼 흘러내리던 물방울과, 비둘기 날개의 다채로움도요. 하늘을 휘저었던 폭풍의 무늬가 살 아래로 드리우면, 오래 버려둔 어깨 위에 차가운 광선들이 쏟아집니다. 가루약이 빠르게 펼쳐지며 무수해지듯 우리는 깨져버린 것들이 더 영롱하다는 것을 알지요. 창문에 적어두었던 소식들이 서서히 휘발하고 세계의 한 귀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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