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자라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과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을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 솟아나는 저녁이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나에게는 빈 새장이 어울린다 피에 젖은 오후의 ..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술집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창백한 담쟁이 잎이 창문 틈의 웅성거림을 따라와 우리의 붉은 잔 속에 마른 가지 끝을 넣어봅니다 이 앞을 오가면서도 당신은 아무것도 얻어 마시질 못했죠 아버지를 부르러 수없이 드나든 이곳의 문을 열고 맡던 냄새와 표정과 무늬들 그 여름에 당신은 마당 가운데 고무 목욕통의 저수지에 익사할 뻔한 작은 아이였어요 아 저 문방구 앞, 떡갈나무 아래, 거기가 당신이 열매를 줍거나 유리구슬 몇 개를 따기 위해 처음으로 희고 부드러운 무릎을 꿇었던 곳이군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 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 얇은 잠옷차림으로 창문 너머의 별을 타고 야반도주하는 연인들처럼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문학과지성사
바다를 보면 어쩐지 번거로워져요 멋지고 놀라워도 어쩐지 번거로워져요 봄을 꽃이나 감동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봄이라 부르는 것처럼 바다도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지 않고 파랗다거나 칠흑이라 표현하지 않고 그냥 물이라고 부르면 될 텐데 번거롭게도 바다 앞에선 생각이 많아져요 바다는 트럭도 삼키고 고양이도 삼키지만 중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져요 그렇기 때문에 매일 밤마다 중력을 이기는 달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에요 그때마다 나는 달빛 아래서 성별도 없는 달이 까맣게 그을리기를 바라고 원하게 돼요 바닷물이 닿았던 골목길을 한 줄 한 줄 모아서 땋다보면 땋는 과정에서 열 번의 한숨 끝에 준비 없이 비를 맞게 돼요 홀딱 젖었고 골목길에 끊긴 곳이 없었으므로 바다와 관련된 나의 모든 것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
이제 떠나야 할 것 같네요 그대 해안가를 떠도는 것만으로 즐거웠어요 그대 외투 빛깔처럼 황토빛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그 바다에 내 얼굴 파묻고 웃고 운 것만으로 그대도 날 그리워할까요 언젠가 그대 향기 잊혀지겠죠 향수병에 담아두지 못했는데 그대 손 한번 잡지도 못했는데 그대 갈망, 슬픔도 껴안지 못했는데 그대가 믿는 모든 게 되고 싶었는데 먹고살기 참 힘들죠 밤새 일하느라 거친 손등 호박잎이구 거긴 밥만큼 따뜻한 얼굴이구 아아, 그새 정들었나 봐요 훌훌 떠나려네요 멀리 꽃나무가 흔들리네요 속절없이 바다가 나를 덮어가네요 - / 민음사
문을 뜯고 네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문을 열어줄 네가 없기에 네 삶의 비밀번호는 무엇이었을까 더 이상 세상에 세들어 살지 않게 된 너는 대답이 없고 열쇠공의 손을 빌어 너의 집에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 같은 신발들 식탁 위에 흩어져 있는 접시들 건조대에 널려 있는 빨래들 화분 속 말라버린 화초들 책상 위에 놓인 책과 노트들 다시 더러워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는, 무릎 꿇고 있는 물건들 다시, 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다시, 너를 눕힐 수 없는 침대 다시, 너를 덮을 수 없는 담요 다시, 너를 비출 수 없는 거울 다시, 너를 가둘 수 없는 열쇠 다시, 우체통에 던져질 수 없는, 쓰다 만 편지 다시, 다시는, 이 말만이 무력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무엇보다도 네가 없는 이 일요일은 다시, 반복되지 ..
밤은 거짓말처럼 조용한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런 밤에는 어떤 소리도 피어날 수 있다 가만히 귀를 열면 전구 빛이 당신 눈썹에 내려앉는 소리도 들린다 흉이 있는 손목 위로 두근거리는 맥박 소리도 보인다 거짓말처럼 밤은 조용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 낙엽 부서지는 소리도 난다 거짓말 같은 밤이라서 우리는 들켜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눈빛을 떨군다 포개어 있던 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거짓말처럼 조용히 벌어진 일이다 무슨 소리라도 태어날 수 있는 이 밤에 감았던 눈을 조용히 뜨면 거짓말같이 빈 의자가 있고 죽은 사람처럼 다시는 당신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밤은 조용하다 숨소리조차 영영 들리지 않는다 -, 문학동네
나는 아이가 없다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 앞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얘야, 하고 불러 멈춰 세운다는 것은, 그때 저 앞에 정지한 그림자가 내게서 떨어져 나온 작은 얼룩임을 알아챈다는 것은 아이의 머리칼에 붙은 마른 나뭇잎을 떼어준다는 것은 그것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이거 봐라, 너를 좋아하는 나뭇잎이다 라고 말하며 웃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도 나를 닮은 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먼 훗날 내 죽음을 건너뛰고 나아갈 튼튼한 다리가 지금 내가 부르면 순순히 멈춰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아이가 없다 아이 대신에 내겐 무엇이 있나 그렇다 내겐 시가 있다 내겐 시가 있다 시를 쓰며 나는 필사적으로 죽음을 건너뛰어왔다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시를 썼다 군대 있을 때 아버지 장례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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