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누울 곳이 없는 밤입니다 모닥불은 꺼지고 부풀어 오르는 구름들이 점점 먼 곳으로 흘러갑니다 찢어진 하늘에 매달린 맨발들을 따라가면 물 위에는 검은 무덤 섬들이 떠내려갑니다 간혹 이름표도 떠오릅니다 버려진 신발에 발을 넣어보는 일은 어제로 조금 다가가보는 일 나의 생에 당신의 먼 생을 포개보는 일 잃어버린 말과 잊지 못할 이름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영영 가지 않는 어제와 오지 않을 내일 사이에서 아직 내게 남은 부위를 확인하는 밤입니다 점점 달은 기울어 발목을 자르고 흘러가는 구름들 우리의 시간은 콕콕 소금을 찍어 먹듯 간결해졌습니다 사실은 그뿐입니다 떠난 적 없는 사람들이 내내 돌아오지 않는 이상한 계절입니다 -, 문학과지성사
백양나무 가지에 바람도 까치도 오지 않고 이웃 절집 부연(附椽) 끝 풍경도 울지 않는 겨울 오후 경지정리가 잘 된 수백만평 평야를 흰 눈이 표백하여 한 장 깨끗한 원고지를 만들었다 저렇게 크고 깨끗한 원고지를 창 밖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오래갈 문장을 생각했다 대밭에 나가 푸른 대나무 수천그루를 붓으로 만들어 까만 밤을 강물에 가두어 먹물로 쓰려고 했으나 너라는 크고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만한 사람이 나 말고는 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아서 그만 두었다 저 벌판에 깨끗한 눈도 한 계절을 못 넘길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결심하였다 발목이 푹푹 빠지던 백양리에서 강촌을 가던 저녁 눈길에 백양목 가지를 꺽어 쓰던 너라는 문장을 , 창비
어떤 날은 노을이 밤새도록 계단을 오르내리죠 그 노을에 스친 술잔은 빛나기 시작하죠 그뿐이죠 그저 그뿐인 것에 시선이 가죠 술을 삼키거나 회를 삼킬 때마다 떴다가 지는 노을이에요 그의 목에 있는 노을을 건드리고 싶지만 내가 사는 곳은 동쪽이라 손댈 수 없죠 술을 마시고 마셔도 내 목에는 노을 지지 않죠 시간만 가죠 밤이 뛰어오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죠 노을 가까이에 다가갈 방법을 알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란 것도 알죠 그는 노을과 함께 곧 이 섬을 떠나죠 그뿐이고 그러니 오늘뿐이고 모든 것들은 원래 다 그렇죠 봄날의 꽃처럼 한철 잠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올해는 오늘까지만 아름답다, 이렇게요 -,문학동네
비가 내렸다 나는 파라솔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시원한 비바람이 좋았다 가을비였다 붉게 물든 낙엽이 거리를 가득 수놓았다 낙엽들은 다 어디서 떨어진 걸까? 너의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와 있었냐는 내 질문에는 답해 주지 않고 너는 빗속으로 향했다 한 발짝씩 멀어질 때마다 네가 줄어들었다 아니, 사라져 갔다 네가 입은 치맛자락은 내가 잡고 있는데 비가 내렸다 낙엽 위로 진흙이 뒤섞이면서 지렁이 한 마리가 때 묻은 얼굴을 내밀었다 내게 멀지 않은 거리였다 네가 막 밝고 지나간 자리였다 주변에는 물안개가 자욱했는데 지렁이는 낙엽 아래에 몸이 대부분 가려져 있었다 내가 달팽이를 보고 지렁이라고 착각한 건지도 몰랐다 너의 발뒤꿈치가 땅속에 파묻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는데 손에서 치맛자락이 미끄러졌다 네가..
마신 물이 다 눈물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늦은 지하철 안에서 깊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포유류가 낼 수 있는 가장 깊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 경전 같은 소리였다. 절박하고 깊은······ 태초의 소리였다. 삶을 관통한 어떤 소리가 있다면 저것일까. 일순 부끄러웠다. 나는 신음할 일이 없었거나 신음을 감추었거나. 신음 한번 제대로 못 냈거나······ 그렇게 살았던 것이었다. 나는 완성이 아니었구나. 내게 절창은 없었다. 이제 내 삶을 뒤흔들지 않은 것들에게 붙여줄 이름은 없다. 내게 와서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은 모두 무명이다.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겠다. 적어도 이 생엔. -, 문학과지성사
몸에 당신의 일기를 베끼고 바다로 와서 지운다. 내 죽음으로 평생을 슬퍼해야 할 사람이 한 명 필요하다. 당신은 말해진 적 없는 말. 모든 걸 씻고. 이렇게 당신이 바다에서 눈물을 흘린 게, 눈물을. 바다의 푸른 계단이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절벽에서 하얀 고통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다. 거품들이 분말처럼 흩어지면 당신이 흘려둔 해식애로 세워지던 안개 도시. 파도는 내 몸에 맞다. 나쁜 말들뿐이다. 나는 아직 당신에게 내 얼굴의 절반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당신은 몇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가. 나는 쓴다. 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다. 쓴다고 생각하기 위해 쓴다. 쓴다. 지운다. -, 문학과지성사
구원이 오고 갔던 날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무뎌졌고 버려진 기름통 위에서 시조새 한 마리 앉아서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건 진화의 증거다. 어느 날 두 발로 일어섰고, 어느 날 양을 키우기 시작했고 어느 날 페니실린을 먹기 시작한 것처럼. 사람들은 책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오래 책의 말을 해왔으므로 책 밖은 아직 위험할 테지만······ 활자는 부서져 먼지가 된다. 사람들은 슬프지 않다. 진화가 더 커다란 이야기이므로. 책 안의 사람들은 책 밖에서 학살될 것이다. 거리에 내걸릴 것이다. 그 순간 대도서관은 끔찍하고 냉정한 타자가 될 것이다. 사라지는 것에 이유는 없다. 검은 글자 몇 개 지층 속에 들어가 남겠지만 계시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리워하지 말 것 세상은 작자미상이..
세상에는 튀어나오지 않은 곳과 튀어나온 곳이있는데 아차, 넘어지려는 순간 나는 잠처럼 완전히 흩어지지 못하고 목적지처럼 자꾸 멀어지지 못하고 그저 조금 기울어진 채 이상한 마음으로 생활을 했다. 무언가 어긋난 꿈을 꾸었다. 진지하게 자살을 상상한 뒤에 또 널 만나서 웃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라면 길이나 부피도 있고 인생이라는 것도 있을 텐데 어째서 이곳은 높이만 존재하는가? 나는 심지어 기울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완전히 세계에 포함된 것이다. 외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드디어 이곳에서 발끝에서 무너지지 않는 각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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