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은 1959년 11월 30일에 발간된 전봉건의 첫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 제목을 빌렸다. 꼬박 6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셈이지만, 특별히 의식하고 정한 것은 아니다. 전봉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데 어째서 그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유 같은 것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것이다. 또 이 시집은 2017년에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과 아침달 출판사가 함께 발간한 한정판 낭독시집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고 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로부터 출발했다. 애초의 구상은 그 시집을 그대로 옮겨 한 부로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그러지는 못했고 조금의 변경이 생겼다. 이 시집의 1부 은 2019년 5월부터 11월까지 메일링 서비스로 발행된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에 ..
원문고개 지나면 거기부터 통영이에요 외지 사람들은 원문고개 지나면 보이는 좁은 만이 하천처럼 보이나봐요 다들 그걸 두고 강이야 바다야 이야길 해요 외지 사람도 통영 사람도 버스가 그곳을 지날 때는 모두 오른쪽에 펼쳐진 바다를 봐요 거기부터 통영이에요 그것은 너무 고단해 오는 내내 잠들어 있던 내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 그렇다면 나는 아직 통영에 온 것이 아닌데 나쁜 일은 아니었다 나 자신의 죽음을 구경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통영 사람들과 밤 부둣가를 걸었을 때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것이 너무 포근하다고 느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통영의 모든 것이 아름답군요! 나는 말했고 돌아가는 버스에서는 왼쪽으로 펼쳐진 바다를 보았다 -, 창비
집 밖을 나서지 못하는 음악과 동거하다 보면 문득 당신이 입술에 와 앉는다 몸을 휘젓고 떠나간 음(音)과 귓속을 맴도는 음 사이 고산병을 앓는 밤 음악은 당신을 발명한다 어느 교인(敎人)들이 불태운 관(棺)을 강물에 띄워 보내는 장례를 치르듯 어떤 심장박동을 빌리지 않고는 날려 보내지 못할 말이 있다 이루어진 소원은 더는 소원이 아닌 것처럼 곁에 없는 사람만을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수 있듯이 한 이름을 흥얼거리다 보면 다 지나가는 이 새벽 당신의 이름을 길게 발음하면 세상의 모든 음악이 된다 기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가 닿지 않기를 바라고 우리는 음악을 울린다 -, 이현호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 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 민음사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 문학과지성사
첫 순간이죠. 이름을 기억하나요, 그대? 아무도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나는 나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내가 여름날 아침 나팔꽃처럼 시들 때 그대는 벼랑 끝에 걸린 아름다운, 더러운 노을이 되시겠다구요? 첫 순간이죠. 어쩌면 마지막인가요? 그대는 또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우리는 혁명을 기다리는 검은 그림자도 되지 못하고 그리움으로 뻗어나가는 푸른 이파리는 더더욱 되지 못하고, 하늘과 땅 사이를 쏘다니지요. 단지, 고삐 풀린 천사처럼. 기억하나요, 그대? 나라는 이름, 그대라는 이름, 이름이라는 이름, 혹은 잘못 붙인 무수한 명명들. 혹은 그 무수한 밤의 멍멍들. 아무도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 장뤼크 고다르..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물 위를 고요가 흘러간다는 사실 물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 오늘 밤에도 그 애가 친지들의 심장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물을 무사히 건넌다는 사실 한양대학교 옆 작은 돌다리에서 빠져 죽은 내 짝은 참 잘해줬다, 사실은 전날 내게 하늘색 색연필을 빌려줬다 늘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많다, 사실일까 사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죽은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못한 것도 많을 텐데 노래가 여기저기 떠도는 이유 같은 거 그 사람이 꼭 죽어야 했던 이유 같은 거 그 이유가 여기저기 떠도는 노래 같은 거 사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짝은 입을 꼭 다물고 건져졌다는데 말할 수 없다 그 애가 들려주려던 사실 어둠의 긴 팔에 각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 문..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 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잠시의 영원이라 믿으며. 섬 저편에 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에도 소라의 품속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구나. 먼 곳이 언제나 외로운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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