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감나무에는 아기 머리통만한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누가 키웠을까 사람도 살지 않는데 산책하다 무심코 한 말에 저걸 누가 키워 알아서 자라는 거지 그가 말했습니다 담장 위로 나란히 앉은 새들은 정답게 울고 겨울을 맞아 잔뜩 털이 올랐네요 과연 그렇군요 다 알아서 자라는 것이군요 언덕길 경사를 따라 햇빛 떨어지는 오래된 동네 새들이 햇살 아래 자주 웃고 떠든다는 생각 살기 좋은 동네 같아, 그것은 우리가 이곳에 떠밀려오던 날, 이삿짐을 풀며 그가 했던 말 그런 말을 듣고 보면 왠지 정말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 인적 없는 집에도 감은 열리고 삶도 사랑도 그렇게 근거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내일은 오고 때때로 눈도 비도 내리겠지요 우리는 이 동네로 떠밀려왔고, 어느새 짐..
그녀는 위대한 배우였지만 사랑에 번번이 실패하는 불행한 여자에 불과했다 흑백의 필름 속에서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랜 세월 버려진 한 늙은 여자의 침실 풍경이 떠오르곤 했다 굳게 닫힌 유리창과 얼어붙은 커튼 자락, 얼룩진 거울과 침대 위에 켜켜이 쌓인 이상하리만치 소중해 보이는 먼지들 그리고 난데없이 떠오르는 헨리 8세식의,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벽난로……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인사들이 자신의 과거를 털고 닦고 정돈한 뒤에 ‘자 지금부터 보시는 것은’으로 시작하는 전시를 하고, 이런 식의 박물관 투어를 하며 우리의 패키지는 얼마나 지루하게 반복되고 또 늙어가는 것일까 타는 향을 즐기기 위해 장작 대용으로 썼다는 고대 영국의 검은 빵처럼, 쏟아지는..
그곳에 꽃이 피었다는 소식 그리고 봄에 대한 의심 그곳에 별이 빛난다는 소식 그리고 밤에 대한 의심 당신의 소식은 늘 당신보다 앞서 있다 나보다 앞서 있는 나의 의심처럼 나는 당신 소식을 봄밤에 들었다 그곳에서 귀는 뜨거울 때마다 붉어지는 장미의 한 잎이라 깨물면 저녁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지 나는 호수로 가 당신의 귀를 만진다 당신의 입술을 잘라 붙인 물수제비들 소식들의 수평이 구멍을 열면 장미는 빛깔로만 피었다 지지 마침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 꽃들의 형장에서 소식은 온다 당신의 귀와 당신의 입 사이에서 꽃들이 목을 잃고 쓰러질 때 꽃잎처럼 호수는 폭발하고 꽃잎처럼 입을 열고 귀를 열고 꽃잎처럼 온몸 구멍을 모두 열면 다시 온몸의 구멍마다 꽃잎처럼 의심이 피어나는 봄밤의 축제로부터 나는 밖을 잠글수 ..
수업이 끝나면 안 돼 교실 밖으로 나가 구름 도서관 위에서 몸을 던질 것 같아 당신은 상투적인 하루를 싫어하니까 그래, 죽는다면 잘 정리된 철학 서적 위에서 날아오른다면 조금은 다른 오후가 되겠지 누군가 당신을 보겠지 내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온 내가 무의미한 설거지에 지쳐 잘 가요, 또 오지 말아요 가난한 내가 가난한 자를 천대하는 마음으로 정말 죽고 싶어 술과 안주와 흘러간 가요 속에서, 돈 몇 푼 오가는 생을 깔보며 나는 말했지 노동이 끝나고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해 전태일은 정말 위대하지 않아? 새벽 두 시쯤 나는 칼끝을 한 번씩 만져보았지 아무렇지도 않았고 호프집 이모는 매일 내게 뜨거운 찌개를 끓여주었지 김 해서 밥 먹어라 당신은 조금 운 것 같아 시리아의 난민과 타국을 떠돌다 죽은..
시인의 말 여기는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밤이라고 쓰고 거기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두운 골방이라고 믿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비정하고도 성스러운 이 세계 앞에서 경악했고 그 야설(夜雪)을 받아내느라 몸은 다 추웠다. 어두운 화장실에 앉아 항문으로 흘러나온 피를 닦으며 나는 자주 울었다. 나는 그것을 간직했다. 고백하건대 시는 내게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 현기증은 내 몸으로 찾아온 낯선 몸의 시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서러워서 길바닥에 자주 넘어졌다. 그사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무수한 책들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나는 여러 번 아버지가 되지 못했으며 눈이 외롭던, 기르던 강아지는 병으로 두 눈을 잃었다. 한 놈은 직접 내 손으로 버리기도 했다. 아들이 시인이 되었다는 소식..
크고 대단한 존재가 될 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도 오늘의 운동이라 친다 저 먼 사바나 누 떼를 만지고 온 알래스카 형상의 흰 구름 떼도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어지러운 머리카락을 조금 다듬었음은 오늘의 건축이라고 치고 오늘의 외출복은 오늘의 간접 화법 찻집 유리창 틀 먼지 한번 훅 분 것은 오늘의 자유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오늘의 숙소 돌아보면 저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고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둥그런 필름통 한 겹씩 감았을 가로수들 거기 낱낱히 찍혔을 순간들 이제야 값지게 되찾으려 흑백의 나뭇잎들 치마처럼 들춰보는 추억은 오늘의 범죄라 친다 많이 되찾고도 여전히 산뜻해지지 않는 날씨는 오늘의 감옥 노랑무늬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 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 난 눈을..
방을 밀며 나는 우주로 간다 산동네 지하 방들은 하나 둘 풍선처럼 떠올라 풍선처럼 날아가기 시작하고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인간의 수많은 움막을 싣고 지구는 우주 속에 둥둥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자신의 분홍을 밀랍하는 일이다 불씨가 제 정신을 뛰돌며 떨고 있듯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 가슴에 몇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 해주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뒤에서만 안고 ..
강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떠나보낼 게 많은 사람이다. 폭우 지나간 철제 다리 위로 이국처럼 노을이 진다. 쓰레기봉투 몇 개 떠다니는 몸집 불린 강을 내려다본다. 오늘도 강에선, 누구는 몸을 던졌고 누구는 떠올랐고, 누구는 몇 달도 못 갈 사랑을 읊조렸다. 제물은 늘 필요하다. 몇은 이번 장마의 제물이 됐고, 한 겹의 뻘이 되어 하구 모래톱에 쌓였다. 영역 다툼에 지친 물새들 줄지어 지나간 모래톱. 병든 고양이가 다 포기한 듯 졸고 있다. 고양이는 이번 장마의 마지막 제물이 될 것이다. 그에게 지금 이 짧은 햇살은 냉정하게 따사로울 것이다. 이곳에선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다. 슬픔도 기쁨도 없다. 쓸려갈 것과 남은 것, 그것만이 가능하다. 검은 구름 저편에 속삭이듯 어둠이 온다. 오늘의 제의는 이..
반쯤 파괴된 동상 모두 사랑했던 동상 사랑하던 사람들 다 가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다 가고 그 후손들 다 가는 이후에도 반쯤 파괴된 채 남은 동상 아주 파괴되지는 못한 동상 동상에게 동상의 외로움 있겠지 동상에게 동상의 슬픔 있겠지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동상 그러나 핏자국 눈물 자국은 있는 동상 이전을 아는 사람들이 만든 이전은 모르는 동상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이전을 가르쳐주는 동상 이제 가르칠 사람이 없는 동상 친절한 동상 슬픈 동상 없는 시간을 사는 동상 아닌 시간을 사는 동상 있어볼 만큼 있어본 동상 슬슬 없어도 되겠지만 없어질 수 없는 동상 사라진 누군가를 모델로 한 누군가의 모델인 동상 누군가가 잊힌 뒤에도 잊힌 누군가의 모델인 동상 그런 동상이 나 본다 반쯤만 인간인 -,..
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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